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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숲 어머니, 어머니

2008.05.07 21:18

chosun 조회 수:4110

신문발행일 2007-11-17 
||||신윤일 목사

며칠 전에 뉴욕에 사시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가끔 전화를 하지만 어제는 마음을 먹고 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아 대화 한 것이 아니라, 전화통이라도 붙잡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어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사랑의 표현인 것 같아서 였다. 지금은 83세가 되어 할머니가 다 되었지만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상당히 여성답고 계란형의 예쁜 얼굴이다.
어머니는 부잣집의 막내 아들인 외할아버지의 첫째 딸로 태어났지만 여자는 공부 하면 안된다고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 집에서 할머니에게 언문을 배우셨다. 그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머니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겨우 언문을 익히자 9살 때부터 여자는 부엌일을 배워야 한다고 부엌에 들어가 외 할머니를 도우셨다. 나이가 80이 넘으신 최근까지 함께 사시는 아버지 때문에 부엌일을 놓지 못했다.   열아홉 살이 되어 시집을 갔다. 일본에 가서 일하면서 집안을 일으키던 가까운 동네의 신씨집 둘째 아들과 혼인을 한 덕분에 일본에서 몇 년을 사시기도 했다. 하지만  아시는 일본말은 수도를 나눠 쓸 때 종종 마주치는 옆집 아주머니에게 웃으면서 하시던 “아리가도 고자이 마스”밖에는 없으시다.

해방 후 대구 역전에 있는 상점이 딸린 적산가옥을 얻어서 잠시 안정을 누리며 사셨다.  아버지의 동생들과 가난한 형제들 뒷치닥 거리 하시느라, 행복도 잠시였다. 형제애가 남다르신 아버지는 내 형제 내가 돌보는데 간섭하지 말라.  싫으면 네가 집 나가라고 우악스럽게 하셨기에 남편이 형제들을 돕는 사람이 된 것 만으로도 감사하며 지내셨다.  당신 자식들 잘 입히면 아버지 형제들 마음 아프다고 그 당시 여유가 있었으면서도 어머니는 명절 때에 자기 자식들 꼬까옷 한번 버젓이 입혀 본적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의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실패하고 서울로 올라 와서는 서울의 판자촌에 자리를 틀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  일년 정도 살았지만 어머니는 그들과도 잘 어울렸다. 가난한 그들에게 적은 액수지만 돈을 빌려 주면 급전 이자는 주던 때였다. 바로 아래 판자집 아주머니에게 돈 빌려 주면서 몇 번 이자를 받았던 어머니는 결국 그 사람에게 돈을 떼였다. 제 기억에 10만원을 빌려 주었든 것 같다. 그 때 어린 나이 였지만 어머니의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난다. “그
동안 내가 이자 재미있게 받은 것만 해도 그 사람이 고맙다. 힘들어서 그런 모양인데 내가 잊어야지…” 틀림없이 떼인 돈이 이자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사를 올 때 그 빚쟁이 아주머니가 고마워 하던 생각이 난다. 그 곳에 있을 때 누님 대학 등록금으로 준비한 돈을 작은 아버지가 와서 떼를 쓰다시피 하여 빌려 갔다. 곧 주겠다고 하고 가지고 간 작은 아버지는 감감무소식 이었다.  아마 그 등록금 다시 마련하시느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꽤나 애간장을 태웠을 것이다.
    자식들 5남매 중 넷을 이민 오기 전까지 서울의 사립대학에 다 보내셨다. 그 때를 회상하며 어머니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내가 너희들 공부 시킬 때, 삽쪽 밖을 몰랐다. 시간도 돈도 없고 나들이 옷도 없어 동네 밖 나들이를 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늘 기억에 남은 어머니의 모습은 몸빼를 입고 일하시는 어머니였다. 아침마다 다섯 개의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 싸지 않던 토요일은 마음이 너무 가벼웠다고 했다. 돈 없이 자식들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도시락 반찬을 넣는 것이 쉽지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 샌드위치 하나 정성껏 싸주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을 안 이후에는 어머니가 자주 생각난다.
   거의 예순이 가까워서 이민을 오신 후 또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  뉴욕에는 아파트마다 관리자가 있었다. 어머니는 영어 소통이 전혀 안되지만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스페니쉬계 관리인이나 그 부인과 늘 대화가 되었다.  한번은 우연히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상대는 짧은 영어였고 어머니는 한국말과 손짓발짓이었다. 어머니가 간혹 사용한 영어가 있었는데 “오케이”와 “땡큐”가 전부였다. 장난끼가 발동해 “뭐라고 합니까?” 물었더니 태연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어머니는 품위가 있었다. 어머니는 옷을 차려 입고 나가시면 자태가 있어 사람들이 교수 부인 같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 말에 속으로 흐뭇해 했다. 하기는 국제도시인 미국 뉴욕에서 외국인과 그 정도 소통을 하시니 교수 부인 될 만도 하셨다.  
     최근엔 한인 봉사센터에서 점심 한끼를 대접하는 프로그램이 생겨 그 혜택을 보시면서 한끼라도 그렇게 해준 밥 먹으니 내가 한결 편하다고 좋아하신다.
     결혼 때까지 부모 밑에서 일 많이 한 첫딸이면서도, 동생들은 논마지기와 땅들을 물려 받아 잘 사는데, 자신은 부모 유산하나 물려 받지 못해도 동생들 원망, 부모 원망 한번도 한 적이 없으셨다. 몸빼 입고 삽쪽 밖도 모른 체 키웠던 자식들 출가하여 자기 살 길 바쁘다고 자주 전화 하지 않아도 섭섭한 마음 다 버리셨다.  어쩌다 전화 해주시면 “새벽기도에 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니 아부지가 네 목소리 듣고 싶어 하드라. 나중에 전화 한번 하그래이”하고 끊으시는 어머니시다.  
   몇 년 전에 아버지와 함께 산 60주년 회혼 식을 하셨다. 건강하신 아버지는 무릎이 아프신 어머니를 두고 늘 혼자 다니신다. 그래도 “니 아버지 건강해서 좋다”고 혼자 다니시는 남편 원망이나 불평, 투정도 않으신다. 심심도 하시고 조금은 얄밉기도 하실 텐데……
  
    어머니는 배운 것이 없으신 분인데, 배운 자식들이 쉽게 흉내 낼 수도 없는 모습을 보이셨다. 설교 속에서 사랑을 말하는 아들 목사보다 어머니가 훨씬 낫다. .   어머니, 내 자식과 교회일 만 신경 쓰면서 어머니에게 전화 자주 못 드려 죄송합니다. 용돈 제대로 못 드려 죄송합니다. 목회 핑계되며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생하시면서도 고생이라 생각지 않고 사셨던 어머니 때문에 제가 컸습니다.  갓 시집온 제 아내에게 “니 남편 잘생겼다”고 은근히 자랑하시던 어머님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제가 이만큼 되었습니다. 멀리서 불효하는 자식이 고백 합 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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