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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없는 질문 “왜 미국에 살지?”

2008.05.21 08:47

chosun 조회 수:4670

신문발행일 2008-05-20 


1C||3||box||3||||“당신은 왜 미국에 왔습니까?”, “왜 미국에 사십니까?” 낯선 미국사람들과 좀더 친해지게 되면 이들이 꼭 물어보는 말이다.
이 질문은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로 다시 해석된다. ‘아니, 뭐야 이거, 내가 미국에 사는게 저한테 뭐 피해 준것 있어? ’ 내지는 ‘아, 궁금해서 물어 보는 것이구나’ 라는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일 수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한인들로부터 받게되면 정말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잘 나갈 수있는데 왜 미국에 와서 고생하냐?’ 내지는 ‘당신은 무슨일 을 했으며 어떠한 이민 생활을 계획하고 있습니까?’라는 두 가지 종류이다. 한가지 더 보태면 ‘혹 한국에서 사기치다 온 것 아니야?’라는 의심섞인 질문으로 확대 해석된다.
왜 미국에 왔냐고? 왜 여기서 사는냐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본인 스스로가 이미 알고있을 것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묻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질문을 정작해야하는 사람은 미국인도 아니요, 주변의 한인들도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이민자라면 자문자답의 형식을 빌어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답을 얻은 후 그에 대한 신념을 재차 각인해야 한다.
몇년전 한국에 계신 아버지가 4개월 가까이 혼수상태로 계시다 돌아가셨다.
그때처럼 미국에 살게 된것을 후회한 적도 없었다. 급보를 듣고 한국으로 달려가 3개월 이상을 체류하며 간절히 소생을 바랬었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남은 가족들의 고생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소생만을 바라며 장기간 한국에 체류할 만은 없는 터였다. 미국생활이 온전히 그것을 허락하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3개월 뒤 미국으로 돌아와 일주일이 지난후 내가 받은 것은 아버지가 운명하셨다는 비보였다. 마치 흔한 드라마 대본처럼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임종을 못지킨 미국에 사는 장남.  미국에 온 후 얻은게 하나도 없다는, 다 잃어 버렸다는 자괴감이 공포처럼 나를 덮어왔다.  
한 달 뒤 한국에서 잘나가는 방송작가인 내 친구는 내 이야기를 이민자의 현실을 그리는 3부작 드라마로 하고 싶다고 의향을 물어왔다.
“너 정도의 이야기이면 당연 연말 대상감이야, 적당히 주류 사회 진출했고, 오케스트라 지휘자에다가, 뭐 돈은 아직 많이 못 벌었어도 희망있고, 아버지의 죽음도 있고, 너 애들한테는 끔찍하잖아, 애들이야기도 있고… 우리 한번 해보자” 그의 집요한 설득은 마침?나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단 한번의 말 실수로.
그의 이 말이 나를 미치게 했다.  ‘너  정도의 이야기… 아버지의 죽음도 있고… ’
“야 ! 네가 미국을 알아? 뭐 동포사회?  주류사회 진출? 그게 뭐하는 건데?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 있어? 네가 지금 내 심정이 어떤지 알기나 해? 나 미국 안 살을꺼야, 미국이 뭔데?”
친구는 프로페셔널이었다. 아랑곳하지않고 승냥이처럼 집요하게 늘어진다.
“아 … 대개 세게 나오네… 야, 다른 미국 동포들은 드라마하자고 하면 좋다고 서로 얼굴내미는데… 넌 뭐냐?  돌아가신 분은 돌아가신 분이구, 정말 말 안통하네, 너 지난번 보니깐 미국물 완전 들었던데, 네가 한국에 다시 와서 살겠냐? 뭐 미국에 안 산다고? 그런데 왜 좋은 자리 다 팽개치고 미국갔냐? 잘 살지도 못하면서… 아 자식, 답답하네….”
그의 말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확했다. 하지만 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 난 미국을 떠나 독일의 어느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오케스트라가 많은 독일에 정착하겠다고 마음 먹은 터라 내 입장은 강경했다.
미국에 왜 살지? 미국에 왜 왔지?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얻어 버리는 사건이 곧 발생했다.
그 사건은 죽음과도 같은 긴 잠을 자던 공주가 왕자를 만나 일순간에 새 삶을 얻은 것처럼, 나에겐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게 하는 출구가 됐다.
당시 조지아주립대에 세계적인 지휘자가 부임했다. 파머 교수는 미국인들 조차도 경외하는 거장 지휘자인데 그로부터 학교 입학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 풀 스칼라쉽에 대학원 조교였다. 이 한마디에 난 독일행 짐을 풀었다.
파머교수가 내게 물었다. “유진, 너는 왜 미국에 왔니? ”
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아니, 날마다 이 질문에 철저히 준비를 해 온 사람처럼 확신있게 답했다. “ 네. 저는 미국에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활동하려고 미국에 왔습니다. 나는 유학생이 아닌 이민자로서 먼저 정착을 해야 했기에 먼 여정을 돌아왔으며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씩 극복해 왔습니다. 살기위해 빌딩청소에서 신문기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일들까지도 지휘자가 되기위해 꼭 필요한 사람에 대한 이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 왔습니다. 지휘자로 활동하는 것, 이것이 제가 미국에 온 이유입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격려했다.“Welcome to United States”
그랬다. 난 미국에 이것때문에 왔었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에 지처 한참을 잊고지냈다. 무대 위에선 지휘자였지만 미국에선 생활을 위해 난 노동자로 더 많이 살아왔었다.  간혹 그간이 노력이 쌓여 저축된 돈도 만져 보았지만 일순간이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 내가 미국에 온 이유가 아니었기에 적당히 자리를 잡아 갈때도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았었다. 늘 마음이 공허하고, 조바심이 가득하고…  더욱이 내가 하는 일이 돈 버는 장사나 사업과는 거리가 멀어 주변의 한인들로부터 ‘이상한 놈’으로 오해(?) 받으며 살아 왔었다.
얼마전 애틀랜타 클라크 유니버시티 오케스트라를 3일 연속 객원 지휘했었다. 연주회는 성공적이었고 연주회 후 청중들에게 사인도 해주었다. 또 상당히 많은 지휘료를 받았다. 연주홀을 나서는데 아버지가 생각났다.
“오늘 지휘하는 것을 보셨으면…”
미국에 왜 왔느냐? 라는 질문은 나를 겸허하게 한다.어디 나 뿐이만이랴?
왜 미국에 사는지를 나름대로 정리 하던 찰라에 딸 아이가 묻는다.
“아빠! 우리는 한국사람이잖아,근데 왜 우리는 한국 안 살고 미국에서 살아? 그리고 왜 미국살면서 한국말 해야 돼?”
갑자기 머리가 아파온다. 이 질문은 나름대로 사연을 갖고 미국에 안착한  한인1세와 달리,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숙명적으로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이 갖는 사회적, 심리적 문제를 동반한 정체성 문제였다.
“왜 미국에 사는냐? 왜 미국에 왔느냐?” 대답없는 질문은 계속된다.
하지만 몇가지 확실한 것은 이 질문의 답이 나 자신에게 해야 한다는 것,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 내가 나 답게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왜 미국에 살지?” 반문할수록 매력적인 자기성찰의 화두이다.


뉴애틀랜타 필하모닉 지휘자
조지아 랭귀지 인스티튜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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